“로봇도 SW다”…세계는 OS 선점 전쟁 중
2014년 06월 10일 (화)
ⓒ 블로터닷넷, 이성규 기자 dangun76@bloter.net
로봇을 육체와 영혼(지능)으로 구분한다면 전자는 하드웨어, 후자는 소프트웨어에 대입해볼 수 있다. 2000년 이전 대다수의 로봇이 영혼을 육체에 가둬놨던 ‘완성체형 로봇’이었다면, 최근들어서는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마음껏 변화하고 진화하는 ‘과정체형 로봇’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의 품을 떠나기 시작했다는 징후이다.
△ 씽크 로보틱스가 제작한 제조용 로봇 ‘백스터’(출처 : 백스터 홈페이지)
소프트뱅크의 로봇 ‘페퍼’, 리씽크로보틱스의 ‘백스터 로봇’은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클라우드 속에서 영혼과 지능이 진화하는 ‘페퍼’나 개발자 손끝에서 쓰임새가 결정되는 백스터 로봇이나, 소프트웨어는 로봇 제작의 핵심 요소로 간주된다. 육체가 파괴되더라도 클라우드 속에 저장된 영혼이 재이식될 수 있는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진다. 로봇 소프트웨어의 진화로 가능진 현실이다.
로봇 OS계의 안드로이드, ROS
로봇 소프트웨어 플랫폼 경쟁은 마치 스마트폰 OS 초기 시장을 방불케 한다. 나라별, 기업별로 독자적인 로봇 플랫폼을 선보이며 시장 선점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로봇발 플랫폼 경쟁은 조금씩 쏠림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으나 아직은 춘추전국시대의 한복판을 통과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 이 부분에선 ROS(Robot Operating System)가 가장 앞서나가고 있다. 윌로 개러지의 ROS는 로봇계의 안드로이드로 통한다. 구글 초기 멤버 스콧 핫산이 창업한 윌로 개러지는 구글 DNA를 품고 있는 기업답게 2009년 8월 ROS.org를 열어 핵심 로봇 소프트웨어 ROS를 오픈소스로 공개했다. 현재 오픈소스 로보틱스 재단 CEO인 브라이언 저키는 자신이 주도한 플레이어 프로젝트를 확장해 ROS를 탄생시킨 공신이다.
2006년 설립된 윌로 개러지는 독특한 성격의 회사였다. 스콧 핫산이 매년 2천만달러의 자비를 들여 자유롭게 로봇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연구를 지원했다. 미국 전역에서 로봇 연구자들이 몰려들었고 소프트웨어 ROS와 하드웨어 PR2를 만들어 로봇 산업의 이정표를 세웠다. 브라이언 저키도 윌로 개러지에 합류했다.
△ 윌로 개러지의 로봇 PR2(출처 : 윌로 개러지 홈페이지)
윌로 개러지는 2010년 ‘대형 사고’를 쳤다. 대당 40만달러에 이르는 로봇 PR2를 전세계 10여개 연구실에 무료로 공급한 것이다. ROS를 로봇 플랫폼의 표준으로 만들기 위한 밑거름이었다. 스콧 핫산의 자금력과 브라이언 저키의 기술력이 더해지면서 ROS는 빠르게 개발자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ROS는 윌로 개러지의 손을 떠나 오픈소스 로보틱스 재단이 관리하고 있다.
윌로 개러지는 여러 로봇 스타트업으로 쪼개진 뒤 2014년 사실상 문을 닫았다. 하지만 핵심 개발 인력들은 대부분 구글이 인수 합병을 통해 흡수한 상태다. 윌로 개러지의 거의 모든 유산을 구글이 승계했다.
ROS를 보편화시키는 데는 리씽크로보틱스 공도 컸다. 2013년 3월 협력적 제조 로봇 백스터를 선보이며 전세계를 놀라게 했는데 무엇보다 로봇 가격이 2만5천달러에 불과했다. 이 로봇은 연구용뿐 아니라 산업용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정교함을 갖추고 있다. 리씽크로보틱스는 지난 5월 개발자들이 기다리던 백스터 연구 로봇용 SDK 1.0을 공개하면서 ROS 생태계를 더욱 살찌우고 있다.
소프트뱅크-알데바란 연합, ROS에 도전장
ROS 중심으로 고착화될 듯했던 로봇 플랫폼 경쟁 구도는 소프트뱅크-알데바란 연합으로 다시 요동쳤다. 소프트뱅크가 손정의 회장의 야심작 ‘페퍼’를 발표하면서부터다. 페퍼는 알데바란의 ‘나오키’라는 플랫폼 위에서 제작됐다. 나오키는 감정의 상호작용 구조에 강점을 지니고 있어 ROS와는 또다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올 9월 SDK를 공개하고 이를 위한 개발자 컨퍼런스도 개최할 계획이다.
페퍼의 실질적인 아버지는 프랑스 로봇 기업 알데바란의 창업자인 브루노 메소니에다.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는 알데바란의 지분 80%를 2012년 1억달러에 인수했다. ‘넥스트 컴퓨터’를 꿈꿔왔던 손정의 회장은 이후에도 수천만 달러를 투자하며 로봇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 성과가 6월4일 휴머노이드 로봇 ‘페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도 일찌감치 이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로봇 산업 내에선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는 못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로봇 플랫폼은 MSRDS다. 2006년 처음 소개된 뒤 지금까지 수십만번의 다운로드를 받을 정도로 호응을 얻고 있지만, 윈도우 계열 운영체제를 필요로 하는데다 개발도구가 유료라는 점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 외에도 일본 정부의 지원으로 진행된 오픈RTM, 에볼루션로보틱스의 ERSP, 유럽의 OROCOS 등이 있지만 ROS로 통합되거나 보완되면서 독립적인 플랫폼으로서의 위상은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로봇 플랫폼도 개방과 오픈소스화가 대세로 자리를 잡았다. ROS는 오픈소스 프로젝트로 전세계 개발자들을 흡수하고 있고, 나오키도 SDK를 공개해 더 많은 이들을 로봇 애플리케이션 개발 생태계로 불러모으고 있다.
장철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지능로봇제어연구실 책임연구원은 “로봇은 인식, 지능, 제어 등 다양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들의 결합체이므로 이들을 통합하기 위한 플랫폼이 필수적인데, 개방형 플랫폼을 통해 만들어진 로봇 소프트웨어는 레고 블록을 조립하듯 로봇 개발에 쉽게 재활용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형 로봇 OS ‘오프로스’, 걸음마 단계
국내 연구자들도 개방형 로봇 플랫폼을 개발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여왔다. 시기적으로도 늦지 않았다. 2004년부터 정보통신부가 진행한 ‘루피’ 프로젝트와 산자부 중심의 ‘스파이어’를 통합해 ‘오프로스’(OPPRoS)라는 개방형 플랫폼을 만들어냈다. 2009년 8월에는 오픈소스로 공개도 했다.
하지만 여타 로봇 플랫폼에 비해 활용률 측면에선 밀리고 있는 형국이다. 개발자 커뮤니티 규모도 아직은 초라하다. 국가 주도 사업으로 시작된 만큼 정부의 마케팅 역량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김문상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지능로봇사업단장은 “ROS는 일찌감치 시작을 했고 자금을 많이 투입해서 커뮤니티도 형성해 왔다”라며 “우리도 정부가 신경을 쓰긴 하는데, 이런 측면에서는 밀리는 것이 있다”라고 털어놨다. 대규모 자본력을 갖춘 윌로 개러지나 소프트뱅크와 비교할 때 정부 차원의 마케팅 역량만으로는 개발자 커뮤니티 확산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김 단장은 “소프트웨어 기술력 측면에선 거의 비슷하다고 본다”면서도 “소프트뱅크가 200만원대에 로봇을 내놓는다는 것은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것인데, 파급효과가 얼마나 클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성주 유진로봇 부사장도 김 단장의 진단에 동의했다. 그는 “오프로스의 장점은 많다. 기능적으로도 나무랄 데가 없다. 로봇을 많이 개발했던 노하우가 있다”면서도 “다만 더 널리 쓰일 수 있도록 활동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개방·공유가 성공 전제조건
로봇 플랫폼의 성장 경로는 흡사 스마트폰의 그것과 닮았다. 개방과 공유 문화 속에서 전세계 개발자들의 마음을 어떻게 유횩하느냐가 성공의 전제조건이 됐다. 다양한 로봇용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이들에게 어떤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느냐도 플랫폼 주도권을 획득하는 열쇠다. 로봇 플랫폼의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할 수 있는 열쇠는 소프트웨어의 개방성과 커뮤니티의 확장성에 달려 있다. 그 싸움은 이미 시작됐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박성주 소장은 “로봇 자체 기술이 워낙 복잡하고 많다”라며 “어차피 일부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머지는 협업을 해야만 한다”라고 개방적인 생태계 구축이 로봇 산업을 좌우할 것으로 전망했다. ‘로봇은 소프트웨어이고, 소프트웨어는 개방’이라는 낯익은 명제가 재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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